1770년 네덜란드의 한 채석장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짐승 턱뼈가 나왔다. 정체 모를 괴수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가 온 유럽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턱뼈가 아득한 옛날 지구에서 사라져 버린 짐승의 뼈라고 주장한 사람은 프 랑스 해부학자 조르주 퀴비에다. 뒷날 공룡(恐龍)이라고 명명된 이 짐승의 모 습이 윤곽을 드러낸 것은,미국의 오스니얼 마슈와 에드워드 코프가 1868년부 터 탐험대를 만들어 공룡뼈를 많이 찾아낸 뒤부터다. 몇몇 학자만이 알고 있던 공룡을 세상에 널리 알려,오늘날 ‘쥐라기 공원’이 나 ‘아기 공룡 둘리’를 탄생하게 한 사람은 뉴욕 자연사박물관의 헨리 오스 번 관장이다. 그는 창고에 처박혀 연구용으로나 쓰이던 공룡뼈들을 살아 있을 때의 모습으로 짜맞추어 박물관에 전시하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또 전시할 공룡뼈를 찾으려고 탐험을 많이 했는데,그의 뒤를 이은 바넘 브라운과 앤드루스의 활약으로 오늘날 공룡에 대한 것은 갑자기 멸종한 원인을 빼고는 거의 밝혀졌다. 공룡뼈를 찾아 나선 학자 가운데 앤드루스는 특히 내몽골에서 공룡 화석을 많 이 찾아내 이름을 떨쳤다. 지질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중앙아시아에서는 짐승 의 화석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오스번이나 마슈 같은 고생물학자는 중앙아시아가 사람의 조상이나 다른 젖먹이 짐승들의 고향일지 도 모른다고 믿어 왔다. 앤드루스 또한 고비사막이 화석의 보고(寶庫)일지 모 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 고생물학자들의 믿음을 뒷받침할 증거물이라고는,1892년 러시아 탐험가가 고비사막에서 주운 코뿔소 이빨 한 개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앤드루 스는 자기가 직접 내몽골을 탐험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적의 세 번째 습격을 물리친 지 1주일쯤 지나 앤드루스 탐험대는 고비사막 언저리의 이렌 다바수라는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다. 저녁녘에 부대장 그랜저 가 싱글거리며 앤드루스를 찾았다. 그가 호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놀랍게도 티 타노테리움이라는 큰 젖먹이 짐승의 뼈였다. 앤드루스 탐험대가 거둔 첫 수확 이었다. 마적과 모래 폭풍에 시달리며 탐험대는 고비사막을 건너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 르에 닿았다. 앤드루스는 몽골 정부의 관리를 앞세우고 알타이 산맥 기슭에 있 는 바가 보그드로 갔다. 관리는 그곳에 용의 뼈로 보이는 것들이 묻혀 있다고 했다. 탐험대는 길도 없는 바위투성이 골짜기를 1주일쯤 걸려 통과했다. 한 작 은 마을에 이르자 관리는 온천에서 쉬겠다며 늙은 사냥꾼을 소개해 주었다. 이병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