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과학이 어렵다, 건조하고 지루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하지만 사실은, 지질과학은 매우 논리적이고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어렵고 지루한 것은 원리와 유래를 모르고 나열된 지식을 기계적으로 외우기 급급하기 떄문입니다. 지질 현상과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에 얽힌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같이 소개한다면,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한 순간에 날아갈 것입니다. 이에 여기에 지질과학 관련 일화를 모읍니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발견에서부터 한국의 지질학 발전 과정에서의 작은 일들까지 관련된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그리고 현재 지질과학을 공부하면서 일어나는 즐겁고 다양한 뒷얘기들을 공유해 주세요.
'6분만에 5천명 사망'...유네스코가 잊지말라 경고한 참극
푸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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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1:13
[오마이뉴스; 2013년 6월 14일]
"이 글은 오마이뉴스 2013년 6월 14일자 신수영 기자의 기사를 제가 그대로 옮겨온 것임을 밝힙니다".
이탈리아에서는 해마다 5월 24일이면 세계1차대전 참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 발발 10개월 후에 전쟁에 참전했다. 70만명의 사망자와 정치경제적 참상 이외에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얻은 건 오스트리아 왕실에 대항해 되찾은 자국의 북쪽 산간지방 영토들이다.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 지방의 알프스자락 산악지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참전 98주년을 맞은 올해는 특히 특별한 행사와 시민운동이 시작돼 주목을 받고 있다. 올해 50주년을 맞는 바이온트(vajont) 협곡 댐 사고를 기억하자는 시민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1차대전에 참여해 숱한 희생과 대가를 치르며 얻은 땅에 세워진 정경유착형 세계최대규모의 댐 바이온트. 그 댐의 무리한 건설계획에 반대하며 자연지형(석회암 지역)이 고려되지 않은 설계의 철회를 요구했던 많은 시민과 단체들은 당시에 '파르티잔(시민군)'이라고 몰리며 탄압을 받아야 했고 댐건설 의혹에 대한 보도는 정부차원에서 봉쇄됐다.
강 줄기를 바꾸고, 산을 막고, 콘크리트를 부어 댐을 만드는 무리한 작업의 부당성을 주장한 시민들에 대해 이탈리아 정부는 이념 문제로 몰아 탄압했으며 예정대로 계획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63년 10월 9일 오후 10시 39분, 댐 때문에 야기된 단 6분간의 산사태로 2500명의 주민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댐사고가 발생했다.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만 1918명이며, 신원 미상 및 시신 분실 등을 포함해 2500여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고로 그 지역은 2002년까지도 접근이 금지됐다. 그후 2008년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인류역사상 기억해야할 사고 지역'으로 발표된 이후에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 지역 주민들은 정부의 공식발표 사망자는 2500여명이지만 그것은 가장 큰 피해마을인 롱가로네의 사망숫자일뿐 그 주변의 피아베 강 인근 마을들(피라고, 리발타, 빌라노바, 파에 등)사망자를 전부 포함하면 사망자 수는 5000명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초대형 참사 때문에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 시민들은 이 길을 지날때 몇 분간 음악이나 라디오를 끄거나 대화를 잠시 중단하며 짧은 침묵을 통해 희생된 넋들을 위로하는 예를 갖춘다.
바이온트 댐 참사, 왜 일어났을까
바이온트 사건 속으로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보자.
1917년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전기, 수도, 가스, 철도사업을 벌였던 사업의 귀재, 쥬세페 볼피(G.Volpi)는 자신의 사업체인 SADE(Adriatic Energy Coporation, 현재의 이탈리아전기업체인 ENEL의 전신)를 위해 바이온트 지역에 수력발전소 건립용 댐건설을 1920년 계획한다.
바이온트는 이탈리아 북동쪽에 위치한 베네치아에서 다시 북쪽으로 100km떨어진 곳으로 알프스산맥의 줄기에 해당하는 바이온트 죠지 산악지대와 그 밑의 피아베 강이 맞닿는 협곡지역이다. 바이온트 지역의 산들은 평균적 높이가 1800~1920미터에 이른다.
이런 바이온트 협곡지대의 댐건설 계획은 애초에 볼피로부터 창안되었으나 그의 사업을 적극 지지하던 무솔리니 정권의 붕괴와 함께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 후 1957년에 본격적인 댐건설이 시작되어 1959년에 완성됐다. 높이 262미터, 두께가 27미터인 초대형 댐이었다.
애초에 댐건설 계획이 발표됐을 당시 반대여론이 상당했다. 석회암층에 댐을 건설하는 것이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와 SADE회사 측은 반대하는 시민들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며, 시민들과 이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들을 연행하면서까지 댐 건설을 추진했다. 이후 댐이 완성된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일어났던 지진 등의 위험 징후에도 대해서도 언론을 통제했고, 댐 설계도의 공개를 요구한 시민단체를 공권력으로 눌렀다.
사고발생 후 재판과정에서 공개된, 설계자 까를로 세멘짜(C.Semenza)가 동료에게 썼던 1961년 4월20일자 편지를 보면 "그 힘든 공사를 우리는 용케도 아주 운 좋게 멋지게 해냈네. 그러나 내 능력을 벗어난, 나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그 뭔가가 거대한 것에 여전히 대책없이 노출된 상태임을 나는 느낀다네.."라고 적고 있다. 댐 설계자 또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1963년 10월 9일, 90인치의 폭우가 쏟아진 밤에 바이온트 산맥의 남쪽부분에 해당하는 높이 1921미터의 톡(Toc)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남으로써 바이온트 댐 안으로 2억 6000평방미터의 암석들이 쏟아져서 5000만 입방미터의 물이 댐 밖으로 범람케된다. 그리고 200미터 이상 높이의 물과 진흙이 치솟아 하류의 2500여명(주민들 추정은 5천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모든 것이 단지 6분 만에 일어났다.
이 사고로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68년, 설계담당 엔지니어 마리오 판치니(M.Pancini)는 정경유착형 하청공사 및 설계미숙에 관련한 법정 진술을 하루 앞두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결국 이 사건은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정경유착형 비리와 무리한 지형변경의 설계가 빚은 참사로 기록됐다. 이 사고는 수많은 저서와 필름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후 한동안 잊혔던 바이온트댐 사건은 각종 정경유착형 비리와 부정부패 비리사건들로 얼룩진 베를루스코니 정권 하에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이 그 시작이 됐다.
5월 24일 1차 세계대전 참전 기념일에 촉발된 바이온트 댐 시민각성운동은 현재 해당 지역을 거점으로 해서 주변도시로 번져 가고 있다. 이 운동에는 초고층빌딩과 수로계획 변경사업 등으로 논란을 겪고 있는 베네치아 시민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오는 6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베네치아 수로를 훼손하는 유람선운행과 정경유착형 크루즈사업에 반대하는 환경단체의 궐기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외에도 정경유착형 비리에 해당하는 CVM PVC 석면 우라늄 등에 의한 산업재해 관련 궐기대회가 각 도시별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같은 시민각성운동은 바이온트 댐 사고 50주년 기념위령식이 열릴 10월 9일,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의 방문 예정일까지 계속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13.06.04 21:46l최종 업데이트 13.06.04 21:46l
신수영(irene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