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화려한 로마문화 다시 꽃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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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화려한 로마문화 다시 꽃피워

쏘니 0 4,756 2009.04.28 14:34
2009.04.27 <한국일보>

LACMA 5월3일~10월4일 ‘폼페이와 로마 빌라’전

폼페이 최후의 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기 79년 8월24일, 베수비오 화산 대폭발로 한순간에 박제돼버린 폼페이의 문화유산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LA카운티뮤지엄(LACMA)은 5월3일부터 10월4일까지 ‘폼페이와 로마 빌라: 나폴리 만의 예술과 문화전’(Pompeii and the Roman Villa: Art and Culture around the Bay of Naples)을 개최한다. 워싱턴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 전시를 마치고 LA로 온 이 특별전은 이제껏 시도됐던 여타 폼페이 전들과는 달리 로마 귀족들이 즐겼던 예술과 문화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기획전이다.

폼페이는 귀족들이 호화로운 빌라를 짓고 피서와 피한을 즐기던 휴양지였기 때문에 상류층 로마인들이 일상에서 즐기던 문화, 미술, 장식품, 주거환경 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줄리어스 시저, 칼리굴라, 클라우디오스, 네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키케로 같은 유력가들이 폼페이와 인근 도시 헤라쿨라늄, 스타비아이, 오플론티스 등지에 별장을 갖고 있었고, 미술가들은 자신의 패트론과 지역 부자들을 위해 수많은 조각, 그림, 모자이크, 장식예술 등을 창조함으로써 이 지역은 상류 로마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번 전시회는 게티 뮤지엄의 큐레이터 케네스 라파틴이 게스트 큐레이터로 참여, 이탈리아 현지의 여러 박물관들과 미국 및 유럽의 개인소장품들을 대여해 옴으로써 이루어졌다. 전시는 5개 섹션으로 나뉘어 소개된다.

▲인물(Patrons and Proprietors)
빌라와 예술품들을 소유했던 사람들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대리석과 청동으로 빚은 1세기 로마 유력자들의 초상은 미화시키지 않고 사실적인 스타일로 제작된 것이 특이하다. 귀족들이 착용했던 금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도 전시된다.

▲실내장식(Interiors)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들과 가구들이 풍성했던 로마 빌라들의 내부 전시장. 특히 1959년과 2000년에 발굴된 한 다이닝룸의 프레스코 벽화들이 하이라이트로, 아폴로와 뮤즈 등을 그린 이 미술품은 미국서 한 번도 전시된 적이 없는 것들이다. 이 외에도 은제 거울, 정교하게 장식된 포도주 그릇과 컵 등을 볼 수 있다.


▲정원(Courtyards and Gardens)
다양한 꽃, 식물들을 그린 벽화와 모자이크들을 통해 폼페이 빌라들은 사색과 휴식을 위해 지어진 곳이었고, 플라토의 아카데미 정원에서는 학습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알게 된다. 당시 정원의 청동과 대리석 조각품으로는 주신 디오니소스와 그 추종자들이 인기였다.


▲골동품(Taste for the Antique)
엘리트 로마인들은 당시 수백년 묵은 골동품인 그리스의 고전미술품을 수집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황금기 때의 오리지널 예술품들을 사들이거나 그리스 신화, 문학, 철학 등에 탐닉했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트로이 전쟁 같은 장면을 그림과 조각에 많이 남겼다.

▲발굴(Rediscovery and Reinvention)
18세기와 19세기에 폼페이 발굴과 재발견은 유럽의 예술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로마의 고전미술에 대한 향수로 골동품 복제산업이 주산업으로 부상했다. 이를 보여주는 18~19세기 회화, 희귀 장서들, 초기 사진작품, 재생복제품, 기념품 등이 전시된다.


◆폼페이는

로마시대 귀족 휴양지로 유명
서기 79년 화산폭발로 사라져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만 연안에 있던 항구도시였다. 고대도시로는 규모가 상당히 컸고 인구가 2만∼5만에 이르렀으며,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아 해안가를 따라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휴양지로 번창했다.

아무 예고 없이 터진 베수비오(Mt. Vesuvius) 화산의 대폭발로 도시 전체가 매몰된 것은 서기 79년 8월. 용암의 분출이 24시간 지속되면서 2∼3미터 두께의 화산력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당시 많은 주민들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했고 그들의 화석이 지금도 유적지에 남아 있다.

전성기의 한 순간에 멸망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의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발굴되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폼페이 유적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무려 2,000년 전의 고대 로마인들이 그렇게나 문명화된 도시생활을 즐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신전들과 광장, 골목골목 아름다운 거리, 잘 정비된 하수도 시설, 극장, 대형 원형경기장, 공중목욕탕, 카페, 식당, 여관, 선술집, 병원 등 각종 시설과 건축물의 수준이 지금 보아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1,500년 이상 잊혀져있던 폼페이는 1709년 베수비오 산 서쪽 마을의 수도원 뜰에서 우물을 파던 일꾼이 대리석 조각을 하나 캐내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738년에는 산기슭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옛날에 쓰인 수도관을 캐냈고 이때부터 땅 밑에 옛 도시가 묻혀 있다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골동품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 알쿠비에르를 시켜 산기슭을 파헤쳤다. 그는 폭약을 써서 15m 두께 바위를 뚫고 ‘헤르쿨레늄 극장’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 1748년에는 또 다른 곳을 파헤쳐 라틴어가 새겨진 돌기둥들과 프레스코 벽화들을 발견했고, 이어 사람의 주검이 발굴되었으며 얼마 후 원형극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1755년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이 ‘소 플리니우스 서한집’을 읽던 중 그 지하도시가 폼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1763년 이곳이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폼페이는 지금도 발굴되고 있다. 자그마치 300년이 넘는 엄청난 작업이 오늘도 진행중이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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