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블랙홀’ 중국을 넘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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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 블랙홀’ 중국을 넘으려면

쏘니 0 4,681 2009.06.16 10:36
2009.06.016 <동아닷컴>

자원 확보 경쟁을 두고 흔히 자원전쟁이라는 표현을 쓴다. 중국은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먼저 시작한 일본을 앞질러 지구촌 자원을 싹쓸이하는 데 갈수록 속도를 내고 있다. 문제는 비록 병사가 죽어 나가지는 않더라도 자원전쟁이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국가의 명운을 걸고 벌이는 실전이란 절박감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데 있다.

중동-아프리카 등 발빠른 선점

주변 국가는 피 흘리는 전쟁을 통해 자원 확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했다. 대동아전쟁을 도발했던 일본은 석유 확보에 실패해 패전의 길을 걸었다.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부터 이념과 영토 팽창의 그림 속에 자원부국으로서의 전략을 구사했다. 중국은 19세기부터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전쟁책동으로 피해자의 아픔을 깊이 새겨야 했다. 자원강국 러시아와는 1990년대 초반부터 국경분쟁의 부담을 덜면서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자원협력체에서 안보기구로 격상시켰다. 동시에 중동과 중앙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주요 자원부존지역을 동맹 강화의 틀 속에서 묶어 나갔다.

자원은 역사적으로 전쟁의 원인이자 목적의 역할을 했다. 어떤 때는 종교분쟁의 탈을 썼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로 투영되기도 했다. 구소련 시절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중동 장악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파이프라인의 중계지라는 지정학적 비중에서 촉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한 1979년의 일이었다. 중앙아시아가 지구촌의 자원공급지로 부상한 오늘, 우리는 아프간전쟁의 재발을 목도하고 있다.

베트남전도 마찬가지다. 1973년 파리 휴전협정으로 일단락되었던 베트남이 다시 전쟁에 돌입하게 된 이면에는 유전의 발견이란 사건이 있었다. 1974년과 1975년 사이 남베트남은 축제 분위기였다. 상업성 있는 해상유전 발견이 연이어 발표됐다.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1974년 11월 전몰 용사의 명복을 비는 횃불을 유전에서 채굴한 기름으로 점화하면서 “우리의 전쟁 영웅들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석유를 구하기 위해 헌신했다”고 치켜세웠다. 몇 달 후인 1975년 봄 북베트남은 총공세를 단행했고 남베트남은 함락됐다.

우리를 둘러싼 자원안보 환경은 그 치열함에서 과거보다 뜨겁다. 이데올로기 대신 개별 국가의 경제 중심적 전략이 지배한다. 당연히 노골적인 국익 확보와 이에 따른 동맹 변화가 나타난다. 자원민족주의도 보유 국가와 소비국가 간의 대결로 확대되고 있다. 경쟁 자원도 화석연료에서 광물자원과 수자원으로 급속히 확산 중이며 경쟁영역도 육상에서 해저, 우주로 확대됐다. 국영기업은 공룡을 방불케 한다. 중국은 풍부한 자금력과 발 빠른 선점정책으로 경쟁 국가를 어렵게 한다. 금융위기라는 악재를 융자를 통한 자원교환으로 타개하고 위안화의 위상 강화로 연결하고 있다.

자원외교 특화전략 속도내야

우리의 대응 속도도 과거에 비하면 괄목할 만큼 달라졌다. 녹색성장과 자원외교가 국가정책의 제일 앞 순위에 있다. 석유공사나 광물자원공사의 자본금을 확충했고 자원개발과 관련한 인력을 다양하게 양성하는 중이다. 인수합병(M&A) 관련 기능까지 보강됐다. 문제는 변화의 속도와 정도가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늦게 출발했고 총력전에서 불리하다면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특화전략을 수립하고 국가안보 차원에서 더욱 가속화하는 길이다. 정책 우선 순위를 가리는 일도 어렵지만 오랜 기간 서방진영에 치중된 인력인프라로 남미나 아프리카 특화전략을 뒷받침하기도 쉽지 않다. 당연히 현장에서는 애간장이 타고 마음만 급하다. 쉬운 길은 없다. 전쟁을 하는 심정으로 뛰어야 벌어진 갭을 메울 수 있다.

김재두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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